취미생활/도서

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1- 만남.

거친꼬리 2018. 3. 25. 22:30



국내에서는 주로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지도를 많이 높였을 '빨강머리 앤'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. 정작 나는 이 만화영화를 직접 본 기억이 없어서 딱히 추억이랄 게 없지만, 웹서핑을 하다가 보게 된 관련 짤방이 뜬금없이 감명깊게 다가온 것이 원작을 찾게 된 계기였다. 잘하면 이 밝은 소녀로부터 마침 요즘의 내게 절실한 긍정 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, 또 어쩌면 기억에 담아둘 만한 명대사를 몇 개 더 수집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 있었는데, 사실 내 리디북스 계정에 진즉 이 시리즈가 구매(정확히는 50년 대여)되어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.



문제(?)의 짤방.



독서의 목적 중 하나가 명대사의 수집이었던 만큼 처음에는 인상적인 대사를 볼 때마다 스크랩을 하며 읽기를 해나갔는데, 이내 스크랩을 포기하게 된 것은 주인공 소녀 앤e 셜리가 내 생각보다 말이 많아도 너무 많아서였다. 사실 사람이든 캐릭터든 말이 과하게 많다 싶으면 썩 좋아하지 않아온 내 성향과 상극이었던 셈인데, 그런 면으론 처음부터 오롯이 앤에 대한 애정을 비췄던 매슈보다 앤의 수다와 허무맹랑함 등을 탐탁하지 않게 여긴 머릴러 쪽이 나와 더 닮아 있었다.


신기한 것은 머릴러가 이 천진난만한 낭만파 아이와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며, 나빴던 인상을 서서히 누그러뜨리고 이윽고 사랑으로까지 바꿔나가는 과정 또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 변화와 똑같은 방향으로 변화해간 점이다. 심지어는 방향성 뿐 아니라 조금씩, 서서히 소녀에 애정을 더해가는 리듬이랄지 호흡까지도 비슷한 사실에 놀라움을 느꼈는데, 어쩌다 기적 같이 타이밍이 맞았다기보단 머릴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 심경 변화와 이에 대한 묘사, 그리고 앤 본인의 매력이 나를 잘 구슬려 나간 것이라는 생각이 글쓰던 중 마침 들었다.



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된 감상의 나열. 이 고전작에 스포일러가 의미 있나? 싶기도 하지만.






1. 이 한 권의 이야기는 처음 그린 게이블즈에 올 당시 열 살 언저리였던 앤이 많은 에피소드를 거치며 조금씩 성장한 끝에 열여섯 살이 되며 마무리 되는데, 실제 리딩 타임은 세 시간 남짓이었음에도 이야기가 끝났을 땐 정말 6년 즈음을 함께한 듯한 감회가 느껴져서 좋았다. 오죽하면 책 말미에 내적으로 상당히 성숙해진 16세 앤을 보며, 예전의 그 천진난만했던 꼬마 앤을 추억하는 기분까지 들었을 정도로 짙은 감회였다. 


개인적으로 최근에 갓 전역한 사촌 동생놈을 보면서 옛적에 종종 나보고 호떡 구워달라고 조르곤 냠냠 먹던 그 어린놈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더란다. 그 감각과 매우 흡사했다. 



2. 처음 '딸'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의 뭉클함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거다.

예상보다 늦게 나와서 더 극적이었다.



3. 이게 어느 정도로 개인적인 견해일지 감은 안 잡히는데, 내가 앤에게 느낀 사랑스러움 중 상당 부분은 앤이 가진 소녀스러움, 즉 스테레오 타입에 기인한다고 느꼈다. 자신의 머리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염색을 했지만 결국 머리를 망쳤다며 방에서 나오지 못했던 소녀 앤, 자신의 옷 소매가 좀 더 유행에 맞게 부풀어 더욱 예뻐지기를 바라던 소녀 앤, 동년배인 소년 길버트를 보며 앤이 느꼈던 묘한 감정과 그에 반해 드러냈던 새침함, 등등. 뭐 이렇게 소년보다는 소녀에게 어울릴 법한 모습들 말이다.


현실의 요즘은 특정 성별에 대해 그에 어울리는 성향이나 역할이 이런 거라고 특정짓지 않아야 한다는 추세이고 나도 이에 동의를 표하지만, 막상 이 소녀스러움에 대해 느낀 호감을 부정할 수도 없는 탓에 생각이 복잡해졌다.






총 열 권짜리 이야기 중 한 권을 읽은 건데, 만족감이 크다 보니 오히려 다음 권을 찾아볼 생각이 줄어들었다. 아이러니.